달항아리가 품은 ‘생각의 관용’

달항아리에서 배우는 어울림의 방식

현재 이태원의 리움 미술관에서 조선의 백자 기획전  ‘군자지향’을 관람할 수 있다. 전시품 중 달항아리는 가장 큰 조선의 백자다. 지름 40cm 이상이 되는 대형 항아리다. 크기로 인하여 제작 방식이 사뭇 다르다. 일반 도자기와는 달리 가운데를 기준으로 상/하부를 따로 빚어 접하는 방식을 취한다. 두 개의 사발을 붙인다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가마에 구웠을때 접합면과 합해지는 형태에 약간의 변형이 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최소의 변형을 가질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과 근현대사의 미술가들은 부정형의 변주까지 달항아리의 미학으로 여긴다.

<Photo by 막강생각>

약간의 어그러짐이 포용성과 푸근함을 안겨 준다. 한덩이 흙에서 만들어지는 대칭지향적 도자기와는 다른 감성이다.
자연스러운 어그러짐은 진짜 달의 형태가 변하는 듯, 내 눈 앞의 달과 같다.

이 어울림은 두 개의 형태가 하나의 형상으로 완성되기 위한 상생의 방식이지 싶다. 고온에서 구분되었던 물성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상/하부 모두 약간씩 서로를 받아드려야 했을 것이다. 이는 곧 디자인이 완성되는 과정과도 같다. 

디자인은 생각, 생각은 글과 스케치로 표현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생각을 만드는 과정이면서 결과물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생각을 도출하는 접근방식이다. 두 가지로 구분한다. 

“글과 스케치”다

글은 사색하는 일이다.
사색은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짐으로 정의된다. 디자인을 위한 사색은 기획, 조사, 분석, 예측 등으로 세분화 되지만, 결국은 글로서 표현되는 형태를 취한다. 글을 쓰면서 생각을 다듬는다. 글을 쓰기에 생각의 핵심을 찾아낸다. 글은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기본적인 생각의 도구임은 분명하다. 

스케치는 그리는 일이다.
흔히 아는 표현으로 밑그림을 말하지만 최종 하나의 밑그림을 위해선 수 많은 스케치가 필요하다. 펜이던 연필이던 끄적이는 행위를 반복한다. 처음에는 아무런 바탕 없이 무의식적으로 여러 선을 긋기도 한다. 무의식으로 시작했지만 스케치를 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유의미한 선을 그리게 된다. 개념의 시각화, 스케치를 통한 아이디어 발상이다.
이는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리는 과정이 곧 생각하는 행위다. 

글과 스케치는 시각정보의 다른유형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훌륭한 도구와 행위다. 또는 행위이자 도구다. 두 가지의 이상적 합해짐이 디자인의 과정이고 결과물이다.

글과 스케치의 불일치

글과 스케치가 만나는 접점은 달항아리의 상/하부가 만나는 순간이다. 서로의 지름이 다르면 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구분되었지만 동일한 접합면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굽기도 전에 버려지는 단순한 흙 덩어리일 뿐이다. 글의 표현이던 스케치의 표현이던 지향점은 동일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의 대립 상황을 자주 직면한다. 보통 어는 한 쪽이 강하면 그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의도는 분명하나 그림표현이 부족해 보인다. 반대로 그림표현은 훌륭하나 타당성이 약해 보인다.’ 어느 경우던 강함이 약함을 설득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바로 대립상황, 용호상박일때다.

예를 들어 본다.
첫 째, 가장 작게는 개인 내면의 갈팡질팡이다. 글의 표현도 좋고, 스케치의 표현도 좋지만 왠지 합이 안 맞는다.
둘 째, 확대해보자.  두 명 이상의 참여자가 서로 다른 표현으로 주장한다. 글의 목적성이 우선이다 스케치를 수정해야 한다. 아니다. 스케치의 해결안이 더 명확하다. 글의 타당성을 개선해야 한다.
셋 째, 더 확장해보자. 다른 부서와의 대립이다. 의견의 불일치와 이해가 상충한다.

어울림의 방식은 연결과 융합

생각의 주체, 규모가 커질 수록 글과 스케치의  대립이 잦아진다. 이것이 다차원 사고력이 필요한 이유다. 서로의 생각을 각자 주장만 하면, 이는 결국 버려야 하는 흙일  뿐이다.

다차원 사고는 일방적 사고의 흐름이 아니다. 연결과 융합의 태도가 기본이 된다. 달항아리처럼  위아래 생각과 생각의 만남이다.  글과 스케치의 만남이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다. 팀과 팀의 만남이다.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접합면, ‘가치 지향점’은 일치해야 한다.

달항아리의 포용성과 푸근함이 주는 어울림의 방식을 느껴보자. 달항아리의 상/하부는 각각의 가치를 품고 고온을 견디며 하나의 큰 형태로 탄생되었다. 각각의 가치를 품어 더 큰 가치로 다가왔다. 약간의 어그러짐은 있을 지언정 그마저 해학의 미로 해석한다. 보는 이에게 부정이 아닌 긍정의 관용적 태도를 이끌어 낸 것이다. 

글과 스케치 일치는 디자인의 완성도와 같다. 글의 가치와 스케치의 가치 지향점이 같다면 이 또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 준다.
결과가 무엇이던, 디자인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긍정의 해석을 끌어 내는 것은 분명하다.

달항아리의 미학적 해석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 포용과 푸근함으로 다가온다. 생각의 대립을 관용의 태도로 바라보라 알려준다.

달항아리에서 배우는 ‘생각의 관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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